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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내전 격화

최근 예멘의 내전 소식이 외신 및 국제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사실 예멘은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분단 국가이자 통일 국가인데요. 이러한 예멘의 역사가 현재 예멘 분열의 배경으로 작용한 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멘을 이해하기 전에 예멘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 그다음 차례로 예멘의 내전 상황까지 살펴본다면 예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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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uralearthdata.com

예멘 정부군, 예멘 남부 거점 '아덴' 탈환

2015년 3월,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를 점령한 이후 아덴까지 장악했습니다. 아덴은 통일 이전 남예멘의 수도로써 반 후티 세력의 중심지였습니다. 후티 반군의 공격을 피해 아덴으로 피신했던 하디 대통령은 또 다시 사우디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후티 반군이 아덴을 점령한 이후, 수니파 중심 국가인 사우디는 후티 반군을 불법 쿠데타 세력으로 규정하고 예멘 전국을 공격했습니다. 시아파 중심인 후티 반군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죠. 사우디는 수니파 중심의 9개 국가와 동맹군을 결성하여 후티 반군을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멘에서는 3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후 2015년 7월, 예멘 정부군은 사우디의 도움에 힘입어 아덴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예멘 정부는 아덴 지역의 해방을 선언하였고 일부 장관들이 아덴을 통해 예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수도 사나를 포함한 대부분 주요 도시들은 아직 후티 반군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버스에서 읽어도 될 만큼 짧고 쉬운 예멘 역사(통일 편)

현재 터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오스만 제국은 1299년도에 생겨나 18세기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중동 지역의 강자로 군림합니다. 예멘 또한 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 사업의 먹잇감이 되는데요. 1517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고, 이후 300년 이상의 긴 세월을 지배 당합니다.

300년의 정적은 당시 중동 및 아프리카 곳곳에 제국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던 영국에 의해 깨집니다. 1839년, 영국이 예멘의 항구도시 아덴이 위치한 남예멘 지역을 무력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예멘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북예멘과 영국이 지배하는 남예멘으로 나뉩니다.

70여 년 뒤인 1914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됩니다. 전쟁은 4년간 진행됩니다. 당시 독일 편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오스만 제국은 독일의 항복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하며, 지니고 있던 대부분 영토를 상실하게 됩니다. 1918년, 때맞춰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북예멘 또한 독립하죠.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중심의 국가였던 탓에 예멘은 독립 이후에도 이슬람 왕조 체제를 유지합니다. 이후 1962년 북예멘 내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북예멘은 기존 이슬람 왕조 체제에서 군사독재/자본주의 체제로 돌아섭니다.

이제 남예멘을 살펴볼까요? 남예멘은 19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합니다. 당시 식민지배 당하던 제3세계 국가들의 독립 러쉬가 영국의 남예멘 지배에도 영향을 끼친 것인데요. 남예멘은 독립 후 구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의 적극적인 원조에 의지하며 성장합니다. 남예멘 독립 2년 뒤인 1969년에는 아예 사회주의 세력이 남예멘 정권을 잡으면서 남예멘은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이라는 공산 국가로 변신합니다.

남예멘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후 남북 예멘은 1970년부터 통일을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엄청난 속도죠? 남북 예멘이 이렇게 빠르게 통일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배경이 있지만, 아무래도 분단이 이뤄진 계기 자체가 체제 갈등, 종파적 이념 등 서로 간 분노나 증오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쌓인 앙금 없이 통일을 논의할 수 있지 않았냐는 분석이 많습니다. 타의로 인한 분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남북 예멘 공동의 인식이 통일의 촉매 역할을 한 것이죠. 또한, 당시 남예멘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사실상 실패하면서 광물자원의 공동 개발과 아덴항 개발 등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통일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논의는 빠르게 시작했으나 130년 이상을 나뉘어 있던 탓인지 예멘의 통일 과정은 무려 20년이 걸립니다. 1990년 5월 22일, 남북 예멘은 협상을 통해 ‘예멘 공화국’이란 하나의 국가로 통일합니다.

통일? 한 번 해본 거면 말을 마! 우린 두 번이나 했어!

예멘의 통일은 남북으로 나뉜 두 정부가 합의라는 민주적 절차를 활용해 이룬 쾌거였습니다. 남북 예멘은 권력 지분을 나누는 데에도 나름 공평한 과정을 거쳤는데요.

당시 자본주의 체제였던 북예멘은 공산주의 체제인 남예멘에 비해 더 많은 소득과 인구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예멘 통일정부의 권력은 남북 비례에 따라 적절히 분배되었습니다.

​정치 수도를 북예멘의 사나에 두고 경제 수도를 남부의 항구도시인 아덴으로 정한 것은 물론, 대통령은 북예멘 대통령이던 살레(Ali Abduilah Saleh)가, 수상은 남예멘 대통령인 아타스(Haider Abu Bakr Attas)가, 부통령은 남예멘 사회당서기장인 알 비드(Ali Salim al-Bid)가 맡는 등 적절한 정치권력 분배에도 힘썼습니다. 각료들 역시 북예멘 출시 19명, 남예멘 출시 15명으로 배정되었고, 통일 의회는 총 301명 중 북예멘 159명, 남예멘 110명, 비당파 31명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통일 직후 예멘은 통일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과 남예멘의 경제 악화로 인해 많은 외채를 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멘 통일 이후 남북이 함께 남예멘 부근에서 발견한 유전 개발 사업에 힘쓰면서 예멘 국민들은 경제 부흥의 단꿈에 젖었죠.

​달콤한 꿈도 잠시, 문제는 외부에서 터졌습니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걸프전에서 예멘이 이라크 편을 들자 이라크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예멘에 대한 경제제재를 단행한 것인데요. 이 때문에 당시 예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남과 북의 문화 차이도 통일 예멘의 주요 갈등 원인 중 하나였는데요. 영국의 지배를 통해 개방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던 남예멘과 왕조 이후에도 군사독재 등으로 엄격한 이슬람 문화를 지니고 있던 북예멘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통일 정부는 이러한 경제, 문화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조직 내부에서도 앞서 언급한 이유로 인한 균열이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살레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의회당이 남예멘에 기반을 둔 예멘사회당을 탄압하기에 이르면서 남예멘인들의 불만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통일 예멘 내의 남북 갈등이 심해지면서 합의통일 4년 만에 남예멘이 통일 예멘으로부터의 분리를 선포합니다. 이 과정에서 남과 북은 내전에 돌입하는데요. 경제력으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우월한 위치에 있던 북예멘은 남예멘의 수도인 아덴을 점령합니다. 결국, 남예멘 분리 선포 2개월 만에 북예멘은 남예멘을 무력 흡수통일합니다.

​남예멘과 북예멘이 두 번째 통일을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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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예멘 철권 통치의 역사, 살레 대통령

​1994년, 예멘 남부 지역 주민들의 분리독립 운동으로 내전 위기를 겪은 통일 예멘. 당시 내전은 통일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남부 지역을 무력 진압하며 발생 2개월 만에 마무리됐습니다.

​이후, 살레 예멘 대통령은 2011년까지 무려 17년간 예멘을 철권 통치했는데요. 1978년 북예멘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까지 합치면 총 33년간 예멘을 통치한 셈입니다.

살레 대통령을 권좌에서 내려오게 한 계기는 2011년 중동 전역을 휩쓴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 사건인데요. 살레 대통령과 그의 정권은 부패와 무능으로 예멘의 경제 및 민주주의를 초토화했습니다. 최근 유엔 안전보상이사회에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 살레 대통령은 재임 33년 동안 최대 600억 달러(약 66조 원)의 재산을 부정 축재했으며, 이 재산을 20개국에 차명으로 은닉했다고 합니다. 이같은 재산 규모는 2014년 예멘의 명목 GDP인 450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2011년 6월 4일, 예멘 살레 정권에 불만을 품은 반정부 세력이 예멘 대통령궁을 공격하면서 살레 대통령은 부상을 입었고,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부통령이 약 8개월간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습니다.

​이후 살레 대통령 퇴진 시위가 격해지자, 살레 대통령은 중동 지역 정치 협의체인 걸프협력이사회(GCC)의 정권 이양 중재안에 따라 2012년 2월 대통령직을 내려놓습니다. 당시 대통령 권한 대행 및 부통령직을 역임하고 있던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는 곧바로 열린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입후보하여 대통령직에 선출됩니다.

예멘 정부군 vs 후티 반군

예멘이 한창 통일로 인한 남북 갈등을 겪고 있을 즈음인 1992년, 예멘 수도 ‘사나’에서는 이슬람 시아파 분파 중 하나인 자이드파의 부흥을 위한 청년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운동을 주도한 모하메드 알 후티와 그의 친형 후세인 알 후티의 이름을 따 이 청년 운동 조직의 이름은 ‘후티(Houthi)’가 되었죠.

이후 10년간 자이드파 청년 조직 ‘후티’는 이렇다 할 존재감을 뽐내진 않았습니다. 자이드파는 많은 시아파 분파 중 가장 온건하며, 오히려 그 성격이 수니파에 더 가깝다고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003년 미국이 시아파 중심 국가인 이라크를 침공하자 같은 시아파 무리인 후티가 친미 성격을 지닌 살레 정권에 대항하는 반정부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예멘 살레 대통령 또한 시아파이긴 했으나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러한 움직임이 예멘 시아파 세력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시아파 세력이 밀집해 있던 예멘 북부 지역이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것도 반정부 투쟁의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후티의 반정부 투쟁에 불을 붙인 사건은 따로 있습니다. 2004년, 예멘 정부는 ‘후티'의 종교 지도자인 후세인 알 후티가 반정부 투쟁을 주도하고 있다고 판단해 그에게 현상금을 걸고 체포를 시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후세인 알 후티가 예멘 정부군에 의해 사살됐고, 후티의 반정부 투쟁은 군사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이후 예멘 정부군과 '후티' 반군은 5년 넘게 내전을 벌이는데요. 반란은 '후티'의 거점인 예멘 북부 ‘사다 주'에서 시작되어 점차 주변 주까지 퍼집니다. 이 사건으로 예멘에는 약 2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며, 예멘 경제는 악화일로로 치닫습니다.

내전의 불씨는 지도상으로 예멘 바로 위에 있는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지잔 주’까지 옮겨붙었는데요. 수니파 중심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아파 반군 ‘후티'의 영향력이 예멘 국경을 넘어 자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길 리 없죠. 이 일을 빌미 삼아 2009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멘 내전에 개입했고, 2010년 2월 예멘 정부군과 후티 반군은 휴전을 합의합니다.

2라운드, 예멘 정부 vs 후티 반군

2010년 2월, 예멘 정부군과 후티 반군은 휴전에 합의했습니다. 2년이 지난 2012년 2월, 앞서 이야기했듯 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내려놓습니다. 이후 부통령직을 역임하던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예멘의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또 다시 2년이 지나 2014년이 됐습니다. 예멘 정부와 후티 반군의 갈등이 다시 불붙는 시기인데요. 갈등의 원인은 ‘예멘을 6개의 자치구 연방제로 변경하자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 때문이었습니다. 예멘 정부가 예멘을 6개 지역으로 나눠 각자 자치권을 가지는 연방제 형태를 제안한 것이죠.

​예멘은 남과 북의 경제력 차이가 상당합니다. 예멘의 최대 수익을 차지하는 석유 원전이 남쪽에 몰려있기 때문인데요. 예멘 최대의 무역도시 ‘아덴’ 또한 남쪽에 있죠. ‘부의 불균형’ 상황에서 예멘이 6개의 자치구로 쪼개질 경우, 가난한 지역은 더욱 가난해지고 부유한 지역은 더욱 부유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연방제 하에서 외교, 군사 정책은 중앙 정부에 의해 직접 통제되지만, 경제 활동에 관련한 대부분의 권한은 자치구에 이양됩니다.

​따라서 각 자치구들은 혼자 활로를 개척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북부의 가난한 지역들이 ‘예멘 연방제’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기억력이 좋은 분은 기억하고 있겠죠? 예멘의 시아파 반군 세력 후티의 거점이 예멘 북부의 사다 지역입니다. 후티 반군과 예멘 정부가 충돌할 명분이 또 다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멘 정부의 헌법 개정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후티 반군은 군대를 움직였습니다. 목표는 수도 사나 점령이었죠. 결국, 2014년 9월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에 위치한 대통령궁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하디 대통령은 후티 반군의 공격을 피해 예멘 남부의 아덴으로 피신했습니다.

​2015년 2월, 수도를 점령한 후티 반군은 임시헌법을 발표해 기존 의회를 강제 해산시켰는데요. 후티 반군은 기존 의원 및 내각을 대신해 자신들이 선출한 151명으로 '혁명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며, 이들이 2년 간 과도 정부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예멘 정부군, 예멘 남부 거점 '아덴' 탈환

2015년 3월,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를 점령한 이후 아덴까지 장악했습니다. 아덴은 통일 이전 남예멘의 수도로써 반 후티 세력의 중심지였습니다. 후티 반군의 공격을 피해 아덴으로 피신했던 하디 대통령은 또 다시 사우디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후티 반군이 아덴을 점령한 이후, 수니파 중심 국가인 사우디는 후티 반군을 불법 쿠데타 세력으로 규정하고 예멘 전국을 공격했습니다. 시아파 중심인 후티 반군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것이죠. 사우디는 수니파 중심의 9개 국가와 동맹군을 결성하여 후티 반군을 공격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멘에서는 3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후 2015년 7월, 예멘 정부군은 사우디의 도움에 힘입어 아덴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예멘 정부는 아덴 지역의 해방을 선언하였고 일부 장관들이 아덴을 통해 예멘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수도 사나를 포함한 대부분 주요 도시들은 아직 후티 반군이 장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