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니파와 시아파

  • 2016년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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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Memune

뉴스퀘어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중동 뉴스들을 보면 꼭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수니파”와 “시아파”죠. 정말 많이 들어본 단어인데, 정작 우리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이슬람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수니’와 ‘시아’의 종파간 차이를 지금부터 구분해봅시다!

by Firas, flickr (CC BY)

한번에 읽는 이슬람의 역사

이슬람교의 탄생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를 짚기 전 우리는 이 종파들의 상위에 있는 이슬람교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이슬람교의 시조는 무함마드(마호메트)입니다. 무함마드라는 인물은 아라비아의 상업 도시 ‘메카’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쿠라이시라는 소수 일족 출신인 그는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을 잃어 숙부인 아부 탈리브의 집에서 성장합니다.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보다 15살이 많은 덕망 높고 부유한 카디자와 결혼하면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됩니다. 상인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무함마드는 종교에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여가시간과 여유를 얻습니다.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현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일정 기간 은거하면서 금욕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610년,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풍족한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메카 북쪽의 히라산에 있는 한 동굴로 찾아가 명상을 합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명상하던 중 그는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마을로 내려와 종교를 창시하게 되는데, 그 종교가 바로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하는 ‘이슬람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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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endium of Chronicles'라는 책에 묘사된 가브리엘과 무함마드의 만남

이슬람교의 확장과 무함마드의 죽음

무함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고 4년이 지난 뒤인 614년부터 그는 세상 밖으로 나가 대중 전도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당시 메카는 다신교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유일신 신앙인 ‘이슬람교’가 전파되기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메카 내의 쿠라이시족이 세력을 키워나가던 무함마드를 견제하기 시작했죠. 결국, 무함마드는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622년 7월 16일 이슬람교 신자들과 함께 메카를 떠나 메디나 지역으로 이주합니다.(이를 ‘헤지나'라고 하며, 이 해가 이슬람력의 원년입니다) 메디나 지역에서 세를 키운 이슬람교 신자들은 교단을 확립하고 군대를 조직하여 630년 메카를 정복합니다. 무함마드는 메카 정복 2년 후인 632년 예언자의 역할을 끝마친 후 가족들 품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당시 고대 아랍사회에서는 부족, 민족, 혈연을 기본으로 한 부족 공동체가 당연시됐습니다.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교는 당시 알라를 믿는 모든 이들이 곧 국민이 될 수 있는 교단 국가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코란)은 무함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은 610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는 632년까지 그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맘은 오직 무함마드의 혈통 뿐" - 시아파

무함마드는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대신해 이슬람교를 이끌어 갈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습니다. 당시 세를 확장하고 있던 이슬람에 종교 및 정치상의 지도자는 분명 필요했으므로 창시자 무함마드를 대체할 수 있는 칼리프 제도가 확립됩니다. 아부 바루크, 우마르, 오스만, 알리 등 최초의 칼리프 4명이 탄생하는데요. 이들은 공동체의 합의에 따라 선출된 최초의 칼리프이기 때문에 ‘정통 칼리프’라는 호칭을 얻습니다.

초대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절친한 친구인 아부 바루크입니다. 당시 무함마드는 아들이 없고, ‘파티마’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 ‘파티마'와 결혼한 무함마드의 사위가 4대 칼리프인 ‘알리'인데요. 무함마드가 사망한 이후, 알리를 지지했던 이슬람 교인들은 무함마드의 가족이며 그의 혈통을 낳을 알리를 칼리프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당시 알리가 무함마드의 장례에 정신을 쏟고 있는 사이, 무함마드의 친구인 '아부 바루크'가 초대 칼리프의 자리를 차지하죠. 알리의 지지자들은 전통과 혈통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매우 반발하며 4대 칼리프인 알리 이전 칼리프 3명을 찬탈자라 비난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알리 이전의 3명의 칼리프를 그들의 이슬람 지도자 ‘이맘’으로 인정하지 않고, 4대 칼리프부터 1대 이맘이라 칭합니다.

이후부터 무함마드, 그리고 알리를 지지하는 이들은 ‘시아투 알리’(알리의 파)라고 불리었고, 이후 ‘시아’라고 알려집니다.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다" - 수니파

3대 칼리프 오스만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그를 반대하는 이슬람인들이 늘어납니다. 결국, 오스만은 암살당하고 그 자리를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가 차지하죠. 알리는 656년 4대 칼리프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그가 무함마드의 사위라는 이유로 칼리프에 즉위한 것을 불만 품는 세력이 생겨납니다. 정통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 세계에서의 정치이고 이것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칼리프라고 생각하는 세력이었죠. 이 세력의 선두에 암살당한 오스만의 사촌 우마이야조가 있었고, 4대 칼리프 알리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혼란 와중에 알리는 칼리프 제도 자체를 부정했던 카와지리 파에 의해 살해당하고, 우마이야조가 칼리프 자리를 차지합니다.

당시 그의 추종자를 아랍어로 ‘순나’(예언자의 본보기)에서 따온 명칭인 ‘수니’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알리를 따르던 시아파는 알리가 죽은 이후 잠시나마 칼리프의 자리에 있던 알리의 아들 하산에게 충성을 바치고 이 같은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의 충성은 수니파와의 갈등으로 번집니다.


여전한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현재 이슬람 세계에서 수니파는 전체 이슬람교도의 90% 정도를 차지하는 다수파입니다. 스스로를 '정통 칼리프'를 지지하는 정통파라 칭하기도 하죠. 앞서 정리한 것처럼 이들이 시아파와 다른 점은 그들의 지도자 ‘칼리프’의 정통성을 더욱 넓은 의미에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종교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면 사실상 누구든지 칼리프, 이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시아파는 이슬람교도의 10% 이하를 차지하는 소수파입니다. 이들은 이맘을 이슬람 성법의 문제에 대하여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최고 성직자’라고 생각합니다.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를 순교자로 추종하며, 언제가 다시 살아 돌아올 구세주라 여기죠. 수니파와 비교했을 때, 시아파가 여기는 이맘은 조금 더 신적인 의미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Sunnishiamax www.lib.utexas.edu
중동 지역 내 수니파, 시아파 분포

결국 이 둘이 지금까지 갈등을 겪는 이유는 자신들의 지도자, 이맘에 대한 정통성을 어디까지 허용하느냐 때문입니다. 물론 지정학적으로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품고 있는 중동 지역에서 이것만을 갈등의 요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과거 이라크에서 소수에 해당했던 수니파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다수의 시아파를 억압하면서 폭정을 일삼았던 점이나, 주변 수니파 이슬람 국가와 시아파 중심 국가인 이란이 아직까지 갈등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랜 과거부터 내려온 수니파와 시아파의 반목은 중동, 그리고 이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