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 2015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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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Memune

제공=포커스뉴스

90%에서 10%까지, 지지율 변화를 이끈 그때 그 사건

2015년 11월 22일 오전 0시 22분,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치료 중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향년 88세의 나이로 서거하였습니다. 사인은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입니다.

한국의 14대 대통령으로 지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재임했던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대표되는 군부 시기를 종식한 최초의 민주 정권입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이끄는 정부의 이름 또한 이를 반영한 ‘문민정부’였죠.

Kimyoungsam1 제공=포커스뉴스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 마련된 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분향소

사실 20년을 넘게 이어진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맞선 김 전 대통령의 투쟁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자 악연은 그 자체로 역사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정권 시절, 김 전 대통령이 말한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문구는 민주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기백을 한 번에 드러내는, 한국 정치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말 중 하나입니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의 삶도 여전히 파란만장했는데요. 흔히들 대통령의 지지율을 보면 대통령의 업적과 오점이 가려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역대 대통령 중 그 주장을 가장 잘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일 겁니다. 임기 초 지지율이 무려 90%에 육박하지만, 임기가 끝날 무렵의 지지율은 10%대에 머물고 말죠.

도대체 김 전 대통령의 임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극적인 지지율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뉴스퀘어와 함께 당시를 되돌아보시죠.

지지율 상승의 원인


하나회 척결

‘하나회’는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12기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육군 내 비밀 사조직입니다. 이들은 12∙12쿠데타를 주도하며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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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쿠테타를 지휘한 전두환 보안사령부의 핵심 간부들, 이들 대부분이 하나회 소속

김 전 대통령의 당선 후에도 하나회 세력은 여전히 군을 장악하고 있었는데요.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직후 하나회 세력 척결에 집중합니다. 취임 13일 만인 1993년 3월 8일, 국방부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하나회 출신 김진영(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육사 19)에 대한 인사 교체를 지시했으며, 이후 4월 한 달간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1∙2∙3군 사령관 등 군 내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던 하나회 출신을 모두 비 하나회 출신으로 교체합니다.

하나회 척결은 그해 여름까지 진행되며, 육사 11기부터 36기까지 포진해있던 하나회 출신 인사 250명은 대부분 진급 누락되거나 전역 조치되면서 권력을 잃습니다.

단호한 하나회 척결은 추가 군사 쿠데타 위협을 방지하고, 군의 정상화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의 업적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금융실명제(1993년 8월 12일)

하나회 척결과 함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갑작스럽게 시행됐습니다. 모든 금융거래(통장 개설, 계좌이체 등)가 실명 인증을 통해 이뤄지도록 하는 이 금융실명제에 대한 시행 정보가 사전에 유출되면 여러모로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커 몰래 준비를 한 것인데요. 급작스러운 시행으로 너무 큰 충격이 시장에 가해졌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금융실명제는 '신한국'으로 가는 데 반드시 넘어야 할 고비길입니다."☞동영상 뉴스는 VIDEO MUG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79516

Posted by VIDEO MUG on 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배경에는 이른바 ‘검은돈’이 있습니다. 지난 1960대부터 한국은 많은 예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예금주의 익명, 차명, 가명 계좌를 통한 금융 거래를 허용합니다.

​실명을 굳이 밝히지 않고도 통장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계좌 이체도 가능했죠. 때문에 이 익명, 차명, 가명을 통한 금융 거래는 온갖 비리의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차명 계좌로 비자금을 조성해놔도 범죄가 적발될 가능성은 극히 낮았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금융실명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검은돈의 실체가 밝혀지면 피해를 볼 사람들이 많다 보니 정책은 논의의 장에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런 금융실명제를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시행해버리니 비리 꽤나 저질렀던 사람들 모두 아연실색했죠.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시행을 통해 당시 베일에 가려져 있던 금융 거래의 투명성을 높였다고 평가받습니다.

지지율 하락의 원인


차남, 측근 비리

1997년 1월, 당시 재계 서열 14위이던 한보그룹 계열사 한보철강은 부도 위기를 맞는데요. 당시 위기의 원인이 한보철강에 대한 특혜 부실 대출로 밝혀지면서 정치권은 큰 논란에 휩싸입니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정계, 금융계 인사들과 유착하여 부실 대출을 일삼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죠. 당시 부실 대출 규모는 약 5조7천억 원대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한보그룹의 부실 대출 사건이 알려지면서, 이들이 손쉽게 부실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정치권과 금융계에 대한 본격적인 검찰 수사가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가 한보그룹 비리 사건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받습니다.

​김현철 씨는 당시 ‘소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정 운영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요. 김현철 씨가 한보그룹 수사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김현철 씨와 관련한 인사·공천·이권 개입 의혹이 쏟아지듯 제기됐고, 검찰은 수사를 벌인 끝에 김현철 씨가 한 기업의 사장으로부터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66억여 원을 받고, 12억여 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를 밝혀냅니다. 이 사건으로 김현철 씨는 2년간 실형을 살게 됩니다.

더불어, 1996년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장학로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 10여 곳의 기업으로부터 수십억 원대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IMF ​외환위기 ​


​당시 종합금융회사(이하 종금사)들은 외국 금융회사로부터 외화를 빌려와 국내 기업들에 대출을 하곤 했습니다. 국가신용도 상승과 OECD 가입으로 인해 비교적 저금리로 외화를 빌려올 수 있었기 때문이죠.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전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는 커다란 금융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들 동남아 국가에도 외화를 빌려준 외국 금융회사들은 동남아 국가들로부터의 자금 회수가 불투명해지자 여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 종금사에 빌려준 돈의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습니다. 결국, 종금사 또한 돈을 되갚기 위해 돈을 빌려준 국내 기업들로부터 자금 회수를 진행합니다. ​여기에 더해, 한보그룹 부도로 한보그룹에 돈을 빌려준 은행과 이 은행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연쇄 부도를 맞게 됩니다. 이제 이 여파는 은행에 예금해놓은 기업에도 번지죠.

​위기가 한꺼번에 찾아오자 기업들은 이를 버티지 못하고 줄도산하기 시작합니다. 기아자동차, 쌍방울그룹, 해태그룹, 한라그룹, 고려증권, 삼미그룹, 진로그룹 등 당시 재계를 주름잡던 기업들이 모두 도산합니다.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경제가 휘청이자 한국 시장에 투자한 외국인 투자자들은 투자 자금을 회수해 가는데요. 이때 발생한 외환 대량 인출 사태로 외환 보유액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우리 정부는 제때 갚아야 할 외채를 갚지 못할 위기에 놓입니다.

<IMF 구제금융 신청 발표한 그날 '영면'…18년 전 특별 담화 현장>"우리 경제는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동영상 뉴스는 VIDEO MUG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79520

Posted by VIDEO MUG on 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결국, 우리 정부는 1997년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합니다. 이후 12월 3일 IMF의 구제금융 승인이 이뤄지면서 우리 정부는 IMF를 비롯한 다양한 국제기관, 국가로부터 약 550억 달러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IMF 구제금융은 김영삼 전 대통령 임기를 통틀어 최대 실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물론 80~90년대에 이어진 고도 성장에 따른 모순이 이 시기 한번에 맞물린 것을 두고, 모든 것을 김영삼 정부 책임을 몰아갈 수는 없다는 의견도 상당합니다.

이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격히 추락하는데요. 이 사건들 전에 있었던 각종 안전사고(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도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에 큰 영향을 끼치죠. 어쨌든 90%대였던 김 전 대통령의 집권 초기 지지율은 끝없는 추락을 거듭해 임기 말 10%대를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