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테러를 외면했나?

Julie Lindsay, flickr (CC BY)

누가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테러를 외면했나?

복스의 <Did the media ignore the Beirut bombings? Or did readers?>를 번역한 글입니다.


옮긴이 : 칼럼을 쓴 막스 피셔(Max Fisher)는 <아틀란틱>을 거쳐 현재 <복스>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제삼 세계의 대중들을 언론이 외면하고 있다”는 주장은 무척 자극적이며 쉽게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사실 언론은 이렇게 비난을 받을 만큼 사안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피셔는 주장합니다. 언론에서 끔찍한 상황과 부조리를 고발해도, 그런 기사를 철저히 외면했던 건 오히려 지금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독자들, 대중들, 즉 우리 자신은 아닌지 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소셜 미디어가 실제 여론이 반영되는 공간이라면, 지난주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공격 이후 트위터에서 가장 많이 퍼진 트윗 가운데 하나가 파리 테러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앞서 일어났던 베이루트의 테러에 관한 트윗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 트윗에 쓰인 저 사진은 사실 지난주 베이루트 테러 당시의 사진이 아닙니다. 이 사진은 2006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타격한다며 레바논을 폭격했을 때의 사진입니다. 사진의 진위보다 저를 더 안타깝게 만든 건 5만 번도 넘게 리트윗되며 퍼진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수많은 미디어가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테러 공격에 관해 대단히 상세하게 보도했습니다.

뉴욕타임스도 보도했고, 워싱턴포스트도 AP 통신의 기사를 받아 먼저 소식을 전한 뒤 특파원을 현장으로 보내 1보를 전하고, 이어 후속 보도로 이 사건을 상세히 다뤘습니다.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도 대단히 사려 깊은 분석이라고 할 만하고, 속보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CNN도 계속해서 베이루트 소식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영국 왕족의 가십성 기사를 주로 다루는 타블로이드 매체 데일리 메일도 베이루트 테러 소식을 타전했습니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많은 언론사가 이 소식을 다뤘지만, 베이루트 테러 공격에 관한 기사는 서방 세계가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대량 살상 사건에 관한 기사가 겪었던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독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외면하는 사이 그냥 그렇게 묻혀버린 겁니다.

언론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비난과 채찍질은 소셜미디어상에서 정말 빠르게 퍼져나가고, 수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에서 보도한 베이루트 테러 기사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해당 트윗의 사진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챘어야 할 독자들이 너무나 쉽게 언론을 향한 비난 대열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는 건 기자로서 억울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아마 아무도 이 기사를 읽지 않을 거야"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제가 처음으로 폭탄 테러에 관한 기사를 썼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2010년 4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는 연쇄 폭탄 테러가 일어나 모두 85명이 숨졌습니다. 서방 세계에서 말하던 것처럼 평화가 정착됐던 상황이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큰 사고 없이 조용하던 차에 일어난 테러였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이 숨지고 다친 인도주의적 재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지역 정세를 뒤흔들 만한 후과가 예상되는 테러 공격이었습니다.

끔찍했지만 대단히 중요한, 한마디로 언론에서 꼭 다뤄야 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틀란틱>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이 사건을 기사로 쓰게 된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독자들이 사건을 더 정확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공격이 일어난 배경과 전후 관계를 설명했고, 향후 정세에 대한 전망과 분석도 곁들였습니다. 당시 저는 출장 중이었는데, 기사를 송고한 뒤 온라인 편집부에서 일하는 동료와 전화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사에 몇 가지 수정해야 할 부분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은 뒤 저는 이 기사가 정말 중요한 내용이니 꼭 홈페이지 첫 화면에 배치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동료도 그래야 하겠다고 답을 했죠. 그런데 뒤이어 제가 제목을 어떻게 달지, 어떤 사진을 싣는 게 독자들의 이목을 끄는 데 가장 효과적일지 의견을 묻자, 동료는 웃으며 제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진을 쓰든, 또 기사 위치를 홈페이지 제일 위에 놓든 어디 구석에 놓든 사실 별로 상관없을 거야. 아마 아무도 이 기사 안 읽을 거니까.”

사실 그가 옳았습니다. 언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연일 아우성을 쳐대며 보도를 해도 대중의 관심을 얻는 데는 늘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료의 생각이 틀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여기며 저 자신을 탓했죠. 제 기사가 재미없고 지루해서, 아니며 제목을 엉망으로 달아서 그런 것일 거라고, 아니면 첫 문장이 너무 뻔했거나, 아, 어쩌면 이 사건이 바그다드에서 일어나서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난 몇 달 큰 테러가 없었다고 해도 여전히 사람들은 바그다드 하면 전쟁을 떠올릴 테니까요. 어쨌든 제가 기사를 더 잘 썼으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끊이지 않았죠.

아직도 저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 길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5년간 정말 그런 기사를 수없이 쓰고 또 썼습니다. 어떻게 하면 독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이런저런 시도를 하기도 했죠. 테러 공격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끔찍한 비극은 전 세계 시민 모두가 정확히 알아야 할 중요한 뉴스 소재라고 믿습니다. 꼭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유권자, 혹은 세계 시민으로서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10년부터 지금까지 제가 쓴 이런 부류의 많은 기사 가운데 독자들의 주목을 받은 기사에는 거의 비슷한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서방 세계에서 일어난 테러가 아닌 이상, 희생자가 어린이 혹은 기독교인들이 아니고서는 독자들에게 늘 외면당합니다. 이는 예외를 찾기 힘든 교훈입니다.

최근 사례만 몇 가지 나열해볼까요? 지난 6월 쿠웨이트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8월에는 태국 방콕에서 테러가 있었죠. 올여름 터키에서는 연쇄 테러 공격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 화제가 된 베이루트만 해도 저는 2012년 10월, 2013년 12월에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테러 공격을 기사로 썼습니다. 지난주 베이루트 테러는 저 말고 다른 기자가 썼습니다.

지금 제가 고생한 걸 알아달라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 말고 많은 기자 동료들이 수년간 그런 테러 공격을 열심히 기사로 쓰고 화면에 담았습니다. 현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하는 그 나라 기자들과 외신 특파원들은 피해자를 직접 인터뷰하고 사건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재구성하며 저보다 훨씬 많은 기사를 타전해 왔습니다. 아마 이들도 그렇게 노력해서 고발한 현실이, 소개한 기사가 독자들로부터 외면받고 그냥 묻혀버릴 것을 알았을 겁니다. 그래도 꾸준히 사건을 예의주시하고 또 현장으로 달려나갔을 테죠. “그래 봤자 아무도 그 기사 안 읽는다”는 말은 언젠가부터 기자들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됐습니다.

주장과 사실 사이의 간극

저는 그래서 왜 아무도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테러는 다루지 않으냐며 기성 언론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던 사람들의 모습에 조금 놀랐습니다. 사실은 이 문제가 아주 상세히 보도되고 있는데도 사람들에게 언론이 이를 외면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그 무언가는 도대체 무얼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누구나 가진 일종의 확증편향이 있을 겁니다. 즉, 사람들은 어떤 주장이 맞는 말로 들려서 그 주장에 동의하고 나면, 그 주장에 부합하는 근거만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죠.

사람들은 이 세상이 서방세계 밖에 사는 민중들의 고통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덜 기울인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실 정말로 그렇죠. 그런데 그 주장에 동조하고 나면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만 눈에 들어옵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야. 봐, 언론도 (베이루트 테러는) 잘 안 다루잖아?” 이렇게 말하는 데 필요한 근거는 선별적으로 확산되고, 반대로 이 주장에 들어맞지 않는 사실은 특이한 예외가 되거나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많은 언론이 베이루트 테러를 다뤘다는 사실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대표적인 트윗에 인용된 사진이 9년 전에 찍힌 전혀 다른 사진이라는 사실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주장 앞에 조용히 묻혔습니다.

폭발력, 파급력의 측면에서는 주장이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사실관계를 정확히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잘못된 사실이 두드러지고 퍼지면, 여기에 호도된 대중은 엉뚱한 데서 문제의 원인을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선한 의도를 갖고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엉뚱한 데 힘을 쏟게 되고 본의 아닌 ‘물타기’에 휘말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끼리 의견이 갈리고 반목하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가디언>의 데이터 블로그 “더 카운티드(The Counted)”에 글을 쓰는 자밀스 라티는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래, 파리 공격은 정말 끔찍했지. 그렇지만 너는 왜 똑같이 끔찍했던 베이루트 테러나 보코하람, 케냐 가리사에서 일어난 테러에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인제 와서 이러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은 사실 대단히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이런 주장은 어떤 면에서 사회경제적, 구조적 모순으로 고통받는 흑인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에게 “그것도 문제지만 사실은 모든 생명이 똑같이 중요한 거야”라고 맞서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물타기 전략 “All Lives Matter”과 대단히 닮았다.

어떤 사건에 슬픔을 표하고 또 필요할 경우 마음의 위안을 얻는 일은 철저히 개인적인 일이다. 누가 어디에 조의를 표하라고 지정해주고, 어떤 일이 더 중요하다고 대신 우선순위를 정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고개를 들어 어디를 보라고 짐짓 충고하는 사람들이 특히 우려스러운 점은 어떤 이들에게서는 마치 비극의 최신 유행을 좇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레토릭이다.

“이봐, 난 당신들이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세상 어딘가의 부조리까지 찾아내서 그 아픔을 나누고 애도를 표하고 있다고.”

그렇지만 물론 저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분노 자체에는 공감하는 편입니다. 이들이 표출한 분노와 절망의 기저에 깔린 비난의 화살이 꼭 언론을 향해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비극을 (파리에서 일어난 비극에 정신이 팔려) 보듬지 못했고, 아마 이런 일이 부유한 서방 세계 밖에서 또 일어나면 제2, 제3의 베이루트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냉엄한 사실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기실 베이루트 시민들은 파리 시민들을 향한 애도와 조의, 연대의 물결을 보고 아무도 자신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베이루트 시민들이 느낀 ‘버려진 이의 고독’을 다룬 뉴욕타임스 기사가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언론의 기사 숫자, 보도 횟수보다도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건 세간의 관심이나 이 세상이 실제로 굴러가는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더욱 편향돼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시리아 난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으로 난민들이 몰려가기 전에도 난민 문제는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였죠. 시리아의 이웃인 레바논이 시리아 난민들로 가장 몸살을 앓는 국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지금까지 프랑스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시리아 난민은 약 6천7백 명입니다.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 난민 몇천 명을 추가로 수용할 의사를 밝힌 적이 있죠. 프랑스를 유럽의 많은 나라가 엄청난 골칫거리가 된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뒤늦게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나온 대책이 이렇습니다. 현재 레바논에 머무는 시리아 난민의 숫자는 110만 명입니다. 레바논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숫자죠. 세계 사회는 구호물자나 자금을 전달했지만, UN이 제시한 아주 기본적인 목표치에는 한참 못 미치는 양이었습니다. 인구의 1/4에 달하는 난민이 머물고 있는데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은 레바논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엄청난 부담일 겁니다. 경제적인 부담은 정치적인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은 어느 면에서 보나 레바논보다 프랑스에 더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그 결과가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기도 합니다.

언론을 비난하는 건 쉽습니다. 언론이 베이루트의 실상을 그동안 제대로 알렸다면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였을 테고 이런 비극도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언론은 실제로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일들을 꽤 상세히 다뤘고, 그 전에 레바논에 불어닥친 시리아 난민 위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언론은 적어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소임을 다해 끊임없이 문제를 고발해 왔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쉽게 눈에 띄는 어떤 대상 하나로 몰아가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것 같지만, 많은 경우 현실은 훨씬 복잡하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불편한 진실은 특정 나라나 지역에 대한 관심이 불공평하게 높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현실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묻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향한 비난이 베이루트나 아부자, 바그다드에서 일어난 많은 일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아마 가장 기뻐할 이들은 저처럼 언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일 겁니다. 지난 수년간 독자들의 철저한 무관심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벌여 온 기자들 가운데는 다소 억울하게 욕 좀 먹더라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고 쓴 기사에 사람들이 그만큼 관심을 가져준다면, 기꺼이 비난을 감수할 이들이 많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