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조선왕조실록

  • 2015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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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신씨

Republic of Korea, flickr (CC BY)

참을 수 없는 ‘수정’의 유혹

역사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죠. 그만큼 정권을 쥐면, 입맛대로 역사를 쓰고 싶어하기 때문인데요. 이는 지금이나 조선시대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왕이 죽은 뒤 신하가 쓰고, ‘실록의 사초는 임금도 볼 수 없다’는 엄격한 집필 원칙으로 쓰였기 때문인데요.

‘태종4년 2월8일 기록에 의하면, 왕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사관은 그 말까지도 기록하였다.’

목이 졸려도 할 말은 하겠다는 사관의 의지가 엿보인다

하지만 권력이 왕에게만 있는 건 아니죠. 실록을 쓰는 사관이 권력층이라면? 권력을 두고 다른 당파와 싸움을 했다면? 조선왕조실록은 당쟁에 휘말릴 확률이 높습니다.

‘한 시대, 두 개의 실록’이 있는 이유입니다. 선조, 현종, 숙종, 경종은 각각 두 개의 실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쟁’입니다.

선조의 경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 있습니다. 두 권은 각기 다른 사람들, 당파에 의해 쓰였습니다. 선조실록은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과 가까웠던 북인의 시각에서 쓰인 글입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이 후 서인들은 선조실록을 다시 씁니다. 선조실록이 북인의 관점에서 서술돼 편향된 기록이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과 누락된 부분을 수정‧보완해야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선조수정실록’이 탄생하게 됩니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류성룡(남인) 왜(倭)와 강화(講和)를 주장하고, 근친(覲親) 중에 술을 마셨다 학행과 효우(孝友)가 있었고 부친의 간병을 극진히 했다
이이첨(북인) 영특하고 기개가 있었으며 간쟁하는 기품이 있었다 선조실록 편찬 때 자신의 일만 기록했다
한준겸(북인) 겉은 관대했지만 속은 음험했다. 사류(士類)를 공격했고 유성룡 다음으로 나라를 망친 죄인이다 당시에 위인(偉人)이라 칭송했고 주로 외직(外職) 생활을 했으며 실록의 서술은 모함이다
기자헌(북인) 과묵했으며 바르고 아부하지 않았다 음험하고 흉악했다. 헛된 명예를 만들어 후세를 속이려 한 것이다
이정구(서인) 사부(詞賦, 漢詩)에 재능이 없어 인망(人望)이 부족했다 중국 사신 전담, 문사(文詞)로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선조실록의 거짓이 심하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행인 건 선조실록이든 선조수정실록이든 한 편만 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죠. 같은 시대를 서술한 다른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를 다채롭게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