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대학살

  • 2015년 10월 14일
  • |
  • 에디터 Memune

2015년 10월 10일, 유네스코가 중국이 신청한 일본군 난징 대학살 관련 자료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습니다. 이 난징 대학살 자료는 당시 일본군이 중국 군인과 난징 시민을 학살했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과 이후 열린 전쟁 범죄 재판 기록물 등입니다.

난징 대학살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였던 대표적인 전쟁 범죄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난징 대학살의 배경은 무엇이며, 당시 난징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937년 7월, 이른바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으로 북경 남서쪽 교외에서 대치 중인 중화민국과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며 중일전쟁이 막을 올립니다.

이후 일본 정부는 관동군을 비롯해 본토의 일본군을 투입해 중국 베이징, 톈진 총공세를 시작합니다. 중국 북쪽의 주요 도시를 손쉽게 점령한 일본군은 곧장 대륙 동쪽의 경제 중심지인 상하이로 향합니다.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투가 2~3개월가량 늘어지지만, 그해 11월 일본군은 상하이 또한 점령합니다.

Nanking3
1940년 당시 일본이 점령한 동북아시아 지역

이후 일본군은 중국과의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향합니다. 일본군이 수도 난징으로 파죽지세로 몰려오자 중화민국 정부는 수도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합니다. 난징을 향해 밀려드는 일본군과 난징을 급하게 빠져나가는 국민당 주요 인사, 부유층의 행렬로 난징은 이내 아수라장이 됩니다.

Iwane matsui rides into nanjing
난징으로 진입하는 일본군

당시 중국군 사령관인 탕셩즈(唐生智)는 난징 시민과 더불어 수도를 포기할 수 없다며 결사항전을 외쳤는데요. 탕셩즈는 휘하 15만 명의 중국군을 데리고 난징성 안에 방어 태세를 갖추지만, 몰려드는 일본군에 제대로 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성 함락을 목전에 둡니다.

결국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에 이릅니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탕셩즈 사령관은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부하 군인, 난징 시민 모두를 버리고 도망쳐버립니다.

성안에는 미처 도망가지 못한 50~60만 명의 중국군과 난징 시민이 남게 됩니다.

난징 대학살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일본군이 난징에서 자행한 학살 사건입니다. 중국 정부는 당시 일본의 전쟁 범죄로 약 30만 명의 중국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합니다.

Nanking4
난징 외곽 양쯔강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일본군

일본군은 투항한 중국군, 젊은 남자를 닥치는 대로 끌고 가 성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무차별 학살했는데요. 기관총으로 살해하는가 하면, 총알을 아끼기 위해 생매장을 하거나 칼로 난도질하거나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일본군이 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그 이후 죽임)의 방법으로 난징 여성들을 학살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일본군은 10대 소녀, 70대 노인 가리지 않고 난징의 여성들을 능욕하고 살해했습니다.

Nanking5
당시 도쿄 니치니치 신문이 보도한 기사 내용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1937년 12월 13일 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에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일본도로 누가 먼저 중국인 100명을 죽이는가를 겨뤘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본군이 난징에 고립된 중국인을 상대로 ‘인간사냥’을 한 것인데요. 당시 일본군의 극악무도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학살이 시작되고 6주가 지난 1938년 봄, 일본군은 그제야 학살을 멈춥니다. 이후 일본군은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하는데요. 난징의 행정, 치안, 교통, 상업 등을 담당하는 이 위원회는 중국인 관리로 구성됐지만, 사실상 일본군의 철저한 통제 아래 모든 사안을 결정했습니다.

​이후 1939년 4월, 일본군은 난징 내에 생체 실험을 주요 임무로 하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는데요. 우리에게 ‘마루타'라고 더 잘 알려진 이 Ei 1644부대는 매주 10명의 난징 시민을 산 채로 실험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사체는 모두 소각로에 불태워졌죠.

Nanking6
왕징웨이

​1940년, 일본은 난징시 정부를 차지한 것에 그치지 않고, 난징을 친일 성향의 괴뢰정부 수도로 만들고자 합니다. 중국 국민당에서 쑨원의 오른팔 역할을 했지만, 장제스의 부각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왕징웨이가 친일파로 변절해 난징 괴뢰정권의 수반이 됩니다. 하지만 일본군을 등에 업은 괴뢰정부는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이 될 때까지 난징 시민들의 민심을 얻지 못한 채 일본군의 꼭두각시 역할을 합니다.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난징 내의 일본군 또한 빠르게 철수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들은 난징 점령 당시 자행한 학살 기록과 생체실험 자료 등을 모두 소각한 채 도주합니다.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난징 대학살은 일본 본토와 서양 국가에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가 학살에 대한 내용이 본토로 흘러들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하고, 서양 관리들을 매수해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했기 때문인데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난징 대학살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1946년 8월부터 1947년 2월까지 일본이 난징에서 자행한 전쟁 범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난징전범재판’이 열립니다.

​이 재판에서 난징 대학살에 동참한 일본군 B~C급 전범들이 처벌받았으며, 난징 시민을 대상으로 인간 사냥을 했다고 알려진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사형당했습니다. 더불어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주요 지휘관인 다니 히사오 중장이 학살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당했습니다.

Nanking7
난징전범재판 재판정 앞에 선 일본군 다니 히사오 중장

이 시기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은 난징 대학살의 총 피해자 규모를 15만 명으로 추산했는데요.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일본의 학살극으로 약 30만 명의 중국인이 살해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난징 대학살 당시 시체 수습에 참여한 구호단체들이 보고한 시신 수가 약 20만 구에 이른다는 점과 강물에 던져지거나 불에 태워진 시체들이 통계에 거의 잡히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피해자 규모는 20만 명을 훌쩍 넘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일본 내 우익 인사나 단체들은 난징 대학살 피해자 규모를 수천에서 수만 단위로 축소하는 것도 모자라 난징 대학살은 아예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일본 역사 교과서 업체 등은 난징 대학살을 단순히 ‘난징 사건’이라고 표현해 대학살을 축소하고 있죠.

​중국 정부는 반세기 넘게 난징 대학살의 피해자 규모를 명백히 밝히고, 난징 대학살에 대한 사실을 축소∙은폐하지 말 것을 일본 정부 측에 요구해왔습니다. 이번 난징 대학살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일본은 더욱 난처한 상황에 빠진 셈이죠.

난징 대학살 등재 두고 으르렁거리는 중일

​유네스코가 중국이 신청한 난징 대학살 관련 자료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것을 두고 일본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 안건은 일·중 간에 견해 차이가 있음에도 중국의 일방적 주장에 따라 신청된 것이며 완전성과 진정성에 문제가 분명히 있다. 이것이 기록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중립적이고 공평해야 할 국제기구로서 문제가 되는 일이기에 극도로 유감스럽다.”

가와무라 야스히사 일본 외무성 대변인

중국은 오히려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일본이 반성해야 한다며 맞불 놓았습니다. 더불어 유네스코의 결정에 대해 일본 정부가 간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난징 대학살은 일본 군국주의가 저지른 엄중한 죄행으로 국제사회가 공인한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는 왜곡할 수 없으며 일본의 태도는 역사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잘못된 태도를 다시 한번 보여준 것. 중국은 일본이 침략 역사를 직시하고 깊이 반성하며 잘못을 바로잡을 것을 촉구한다. 또 유네스코의 정상적 업무에 대한 간섭과 무도한 방해(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 ​

​​열 받은 일본 정부, 급기야 유네스코 출연 분담금을 중단하거나 감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일본 방송에 출연해 한 말입니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에 출연하는 분담금을 중단 및 감축하는 것 등을 포함해 검토하고 있다. (유네스코의 결정은) 밀실에서 행해져 법률에 의한 것도 아니다. 투명성과 공정성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작년 한 해, 일본 정부가 출연한 유네스코 분담금​ 규모는 약 3천5백만 달러(약 400억 원)입니다. 이는 유네스코 전체 분담금 규모의 11%에 해당합니다. 국가별 순위로 보면 일본은 전체 분담금 중 22%를 차지하는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의 유네스코 분담금은 약 1천6백만 달러(약 190억 원)로 전체 6위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엄포는 유네스코 입장에서 굉장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미 결정한 사항에 대해 유네스코가 입장을 선회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요. 때문에 일본이 앞으로 남은 일본군 ‘위안부’, 군함도 강제 노역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도록 힘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